
며칠 전, 지난 자료를 찾기 위해 외장 하드디스크를 열었다. 그때 우연히 눈에 들어오는 파일이 “프리다 칼로 - 절망에서 피어난 천재 화가”였다. 벌써 10여 년이 지났다. 무더위가 한창일 때 다녀왔던 그때의 기억을 소환하는 도중에 프리다 칼로와 함께, 나란히 떠 오르는 사람, 나혜석과 카미유 클로델이었다.
나혜석과 프리다 칼로, 카미유 클로델, 그들은 20세기 전반이라는 격동의 시대를 살았던 예술가들이었다. 한국과 멕시코, 프랑스라는 서로 다른 국가의 문화권에서 살고 활동했지만, 이들이 걸어왔던 발자취는 놀라우리만큼 닮아있다.
사실, 지난 역사는 오랫동안 여성의 역할을 제한해 왔다. 누군가의 딸, 아내, 그리고 어머니로서 자신의 욕망보다는 가족의 안녕과 보살핌을 미덕으로 여겼었던 시대가 있었다. 물론, 문학과 예술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로 여성은 창작의 주체가 아닌, 그림 속 모델이나, 또는 보조역할을 하는 존재로 기억되어 왔다. 이러한 환경과 질서에 따르지 않고 도전장을 내밀며 여성으로서 자기의 삶에 주인이 되려고 했고, 되었던 여성들이 바로 위의 세 여성이다. 그들은 붓과 조각을 통해 시공간을 뛰어넘었고, 시대의 굴레를 벗어난 여인들이었다. 특히 가부장제라는 남성 중심의 사회 속에서 자기만의 개성을 발휘했다.
나혜석(1896~1948)은 한국 근대의 최초 서양화가 한 사람이면서 작가이고 여성 해방론자였다. 특히 그는 여성의 모성과 결혼, 정조에 대한 기존의 관념을 과감히 지적했고 강요된 도덕의 잣대를 신랄하게 비판한 문필가이기도 했다. 특히 최린과의 스캔들, 그리고 이혼의 경험 때문에, 남편을 버린 몰염치한 여성으로 낙인이 찍히기도 했다. 그래서일까 그녀가 가는 곳마다, 뭔가를 집어던지고 고함을 지르는 광경이 목격되기도 했다.
프리다 칼로는 멕시코의 거장인 디에고 리베라가 남편이다. 리베라의 명성이라는 그림자에 오랫동안 가려져 왔다. 무엇보다 어린 시절 그는 질병과 교통사고로 끊임없는 상처의 아픔을 안고 후유증으로 평생 살면서도, 자신의 그러한 모습을 감추거나 포장하지 않았다. 오히려 고통받는 신체의 내면을 그림으로 승화했고, 자화상 등을 통해 자신을 설명하기도 보다는 스스로 바라보는 그림을 그렸다.
카미유 클로델은 연인이면서 스승이었던 오퀴스트 로댕의 제자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로댕과의 관계로 보는 시선은 접어야 한다. 이유는 그만의 독자적인 창작자이기 때문이다. 그는 남성 중심의 시대적 배경을 벗어나 자신만의 독창적인 조각가로 인정받으려고 무척 노력했지만, 당대 사회의 여성에 대한 편견과 시선으로부터 선뜩 벗어나기는 힘들었지만,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추구했다.
이처럼, 세 사람은 자신을 송두리째 내 던져진 경험을 했다. 그러했기에 사회적인 질타와 냉대의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지상의 법칙을 버리고 자신만의 흐름에 몸을 맡긴 것이다. 헤르만 헤세가 데미안에서 "모든 사람은 자신만의 길을 찾아야 한다. 그 길은 아무도 대신 걸어줄 수 없다“ 고 얘기했듯이, 이들은 누가 대신 걸어줄 수 없는 길 위에 자신만을 발자국을 남겼다.
세 사람의 공통점은 단순히 불행한 삶을 살았다는 데 있지 않고, 그들이 추구하는 예술의 지향점을 통해 증명했다는 점이다. 한 여성이 여성의 신분과 이름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이며, 자신을 스스로 바라보고 자신만의 예술작품이라는 언어를 통해 자신만의 이름으로 작품을 남긴다는 것은 무엇인가에 끝없는 질문을 던졌던 그들, 비록 사는 곳과 세 명의 이름은 달랐지만, 붓끝과 조각에서 피어난 생각은 같았다. 그리고 그들의 작품 활동과 시대를 앞선 행위를 통해 페미니스트의 선구자로 평가할 수 있다는 점도 익히 알 수 있었다.
[홍영수]
시인. 문학평론가
제7회 매일신문 시니어 문학상
제3회 코스미안상 대상(칼럼)
제4회 한탄강문학상 대상
제7회 보령해변시인학교 금상
제6회 아산문학상 금상
제5회 순암 안정복 문학상
제6회 최충 문학상
시집 『흔적의 꽃』,『지구의 유언장』
